계엄령은 국가 비상시 국가의 안녕과 공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헌법 일부의 효력을 일시적으로 중지하고 군사권을 발동하여 치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국가긴급권의 하나로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고유 권한입니다. 어제 윤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오늘 새벽에 해지가 되는 해프닝? 이 발생되어 우리나라 역대 계엄령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4.19 혁명(1960. 4.19)
제1공화국 이숭만 정권 시대에 부정부패와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하기 위한 시도가 진행이 되어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확산이 되어 1960년 4월 19일에 이른바 "4.19 의거"가 발생을 하였습니다. 그 후 서울의 치안이 통제 불능 상태로 이르자 이승만 대통령은 오후 3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을 출동시켜서 학생 시위를 제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계엄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도덕성을 인정하고 학생들에게 계엄군 탱크가 장악이 되는 상황이 나오면서 계엄령은 효력을 잃고 결국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는 상황이 나왔습니다.
5.16 군사정변(1961. 5.16)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정권이 들어섰는데 무기력과 혼란이 전반적으로 사회를 휩싸고 있자 박정희가 주도하는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였습니다.(1961. 5.16) 군부는 당일 새벽에 서울과 언론사를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아침 9시를 기하여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장면 정권을 인수하였습니다. 윤보선 대통령에게 당시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유엔군 사령관 맥그루더 장군은 혁명군을 진압하는 것을 요구하였는데 장면내각이 이미 무기력해졌음을 알아차린 윤보선 대통령은 군사쿠데타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군사정변을 성공하고 모든 국내 치안이 계엄군에 의해 유지되었습니다.
6.3 사태(1964. 6. 3)
제3공화국 시절에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위해 "한일회담이 진행 중일 때 학생과 시민들이 반대 시위를 하였습니다. 6월 3일 대규모로 학생시위;가 일어나자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4개의 사단이 투입이 되어 학생시위를 진압하였습니다. 휴교령이 내려지고 언론검열, 집회금지 등 영장 없이 체포 구금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10월 유신(1972.10.17)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과 개혁의 지속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한국적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역설을 하면서 1972년 10월 17일 19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유신정치"를 시작하였습니다. 4개 항목의 비상조치를 발령하고 특별선언까지 발표하여 국화해산과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하고 헌법 일부를 중지 그리고 비상국무회의 작동을 선포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1979.10.26)
10월 유신의 무리한 추진이 국민의 불만이 최고조로 이르렀고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였습니다. 갑작스러운 국가원수 부재사태가 발생을 하여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어 질서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국가 원수는 국군통수권을 가지고 있어서 대통령의 부재는 국가의 큰 혼란을 초래할 수가 있어서 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계엄사령관은 그 당시 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이 맡았으며 후에 12.12 사태로 신군부세력의 제1표적이 되어 체포되었습니다.
12.12 사태(신군부 쿠데타, 1979.12.12)
10.26 사태 이후 최규하 대통령 체제로 불안한 정국이 이어지고 있을 때,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 세력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서(1979.12.12. 18시) 당시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하여 하극상으로 순식간에 군권과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어서 신군부는 12월 13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규하 정부를 접수하여 새로운 군사독재 시대를 열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1980. 5.18)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시민 집회가 대규모로 진행이 되면서 신군부에게 더 이상 혼란을 방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만들게 하여 5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각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게 하고 계엄군을 주둔시켰습니다. 5월 18일 광주 전남대학 학생들이 등교가 저지되면서 계엄령과 휴교령 해제를 외치면서 시위를 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이 날 계엄군은 공수특전단과 탱크를 동원하면서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역대 계엄령 선포가 국가적 혼란 때문에 일어난 게 아니고 내부 정치적인 혼란 때문에 국민의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서 비상수단으로 발동되는 상황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볼 때 계엄령의 잦은 발동은 명예롭지 못한 역사이면서 민주주의에 크나큰 상처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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